시어머니 꿈 해몽, 그 자리에는 물려줄 날이 정해져 있었다
꿈에 그 얼굴이 나왔다면 물음은 대개 한쪽으로 모인다. 저쪽이 나를 어떻게 여기길래 여기까지 나왔을까. 시어머니 꿈 해몽에서 먼저 말해 둘 것은 이것이다. 이 꿈을 흉몽 쪽에 세워 둔 풀이는 찾기 어렵다. 다만 이 꿈이 알려 주는 것도 그 사람의 속은 아니다.
갈리는 데는 장면에 있다. 그 사람이 나를 마주 보고 있었는지, 나를 지나쳐 다른 데를 보고 있었는지, 내 쪽에서 눈을 피하고 있었는지. 이 셋이 풀이를 가른다. 여기에 하나가 더 붙는 때가 있다. 명절을 앞두고 있을 때다.

목차
시어머니 꿈이 명절 앞에 유난히 잦은 데는 까닭이 있다
이 꿈자리가 몰리는 건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날짜가 잡혀 있어서다. 만날 일이 달력에 박혀 있으면 낮에도 몇 번씩 머리를 스치고, 그 스침이 새벽녘 꿈자리에 얼굴을 빌려 나온다.
슈레들과 호프만은 「Continuity between waking activities and dream activities」(『Consciousness and Cognition』 12권, 2003)에서 낮에 오래 한 일이 그 시간에 비례해 꿈에 나오지는 않는다고 적었다. 읽고 쓰는 것처럼 바짝 집중하는 일은 드물게 나타났고, 사람과 말을 주고받는 일 쪽이 훨씬 자주 나타났다. 두 사람은 이 차이를 감정의 세기만으로 돌리지 않고 렘수면일 때의 뇌 상태 쪽으로 돌렸으며, 연속성 가설에 활동의 종류라는 변수를 더 넣어야 한다고 봤다. 활동 종류별 빈도를 잰 연구이지 누구 얼굴이 왜 나오는지를 정한 연구는 아니다. 거기까지만 빌려도 방향은 나온다. 얼굴을 맞대고 말을 주고받는 일은 꿈이 잘 받아 가는 종류다.
옛 풍속은 그 자리에 물려줄 날을 함께 붙여 두었다
우리는 시어머니라는 자리를 끝이 없는 자리처럼 느끼지만, 옛 살림은 그렇게 두지 않았다. 안방물림이라는 풍습이 따로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낱말을 「시어머니가 일정한 연령에 달하면 며느리에게 살림을 내어주고 안방을 물려주는 풍습」으로 적어 두었다(이광규 집필, 1995). 대개 예순 언저리였고, 큰 잔치를 열어 열쇠꾸러미를 넘기면 며느리가 절을 올려 받았다고 한다. 살림의 중심이 안방이었으니 넘어간 것은 방이 아니라 집안일을 정하는 자리였다.
그러니 그 자리에 붙어 있던 것은 권한만이 아니었다. 넘겨줄 날이 함께 붙어 있었다. 이 사실 하나로도 꿈에 나온 얼굴의 무게가 좀 달라진다. 살림을 내고 짐을 옮기는 꿈을 겁나는 징조로만 읽지 않는 것도 같은 결이다.
옛이야기 쪽도 비슷하다. 같은 사전의 「살림 잘하는 며느리」는 부잣집이 며느릿감을 고르며 시험한 것이 살림 솜씨였다고 전한다(강진옥 집필, 1995). 잣대는 솜씨였지 속마음 읽기가 아니었다. 그 시절 살림이 수월했다는 말은 아니다. 귀머거리 삼 년, 벙어리 삼 년, 장님 삼 년이라는 속담이 남은 것만 봐도 그 짜임은 셌다. 다만 그 속담은 그 시절 살림을 적은 것이지 꿈에 나온 얼굴의 속내를 적은 것이 아니다. 집안 어른이 나오는 꿈을 무겁게 읽어 온 습관도 상당 부분 그 짜임에서 왔다.
시어머니 꿈 해몽, 장면마다 갈리는 자리
같은 얼굴이라도 그 눈이 어디를 향했느냐로 풀이의 방향이 갈린다. 떠오르는 장면 하나만 붙잡으면 된다.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면
웃고 있었다면 편한 쪽으로 읽어 온 장면이다. 꿈에 오는 웃음은 그날 내 안에 여유가 남아 있었다는 표시로 봤다. 웃는 꿈을 따로 푸는 자리도 있다.
말없이 보고만 있었다면 불편해도 흉조는 아니다. 정리되지 않은 할 말이 그대로 옮겨 온 장면에 가깝다.
꾸짖고 있었다면 겁부터 낼 일은 아니다. 무엇을 두고 한 말이었는지 기억난다면, 챙길 것이 남았다는 신호로 읽는 편이 낫다.
손을 잡거나 등을 쓸어 주었다면 순한 장면이다. 화해나 도움이 들어올 여지로 읽는다.
나를 지나쳐 다른 데를 보고 있었다면
다른 사람과 말을 나누고 있었다면 내가 그 자리에서 조금 비켜서 있다는 느낌이 남은 것이다. 길흉보다 거리에 관한 장면이다.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면 섭섭함이 앞선다. 그래도 돌아선 뒷모습은 끝이 아니라 잠시 물러선 자리로 읽어도 된다.
내가 불렀는데 못 듣더라면 전하지 못한 말이 있다는 표시로 본다. 그 말을 아는 건 꾼 사람뿐이다.
내 쪽에서 눈을 피하고 있었다면
숨거나 자리를 떴다면 부담이 앞선 상태다. 이럴 때는 꿈보다 일정이 먼저다.
집이 낯설었다면 사람보다 장소가 걸린 것일 수 있다. 낯선 집이 나오는 꿈자리는 적응 쪽으로 읽는 갈래가 따로 있다.
내가 시어머니 자리에 서 있었다면 놀랄 장면이지만 흉몽으로 볼 것 없다. 맡게 될 몫을 미리 재 본 꿈으로 읽으면 앞의 안방물림과 결이 맞는다.
시어머니 꿈에서 검색이 가장 많이 갈리는 세 갈래
돌아가신 시어머니 꿈
겁먹는 사람이 많은데, 전해오는 풀이는 세상을 뜬 어른이 나오는 꿈을 나쁜 소식으로 몰지 않았다. 찾아온 손님으로 보고 상을 차리던 쪽에 가까웠다. 갈래는 죽은 사람 꿈에서 따로 풀어 두었다.
시어머니와 다투는 꿈
험한 장면일수록 놀라지만, 다투는 꿈은 쌓인 것이 빠져나가는 자리로 읽는 갈래가 있다. 이 갈래는 싸우는 꿈 쪽이 더 자세하다.
시어머니가 밥상을 차려 주는 꿈
받는 쪽이었다면 순하게 읽는다. 옛 살림에서 상을 차려 내는 일은 그 사람을 식구로 셈했다는 뜻에 가까웠다. 내가 차려 내고 있었다면 맡은 몫이 늘어난 때라는 뜻으로 봤다.
꺼림칙했다면 손볼 데는 어디인가
흉한 갈래를 숨길 생각은 없다. 다만 옛 풀이에서도 이런 꿈은 벌이 온다는 쪽보다 손볼 데가 있다는 쪽으로 쓰였다. 앞은 기다리는 일이고 뒤는 오늘 할 수 있는 일이다.
아직 오지 않은 자리를 밤에 미리 겪는 셈인데, 그건 몸이 대비하는 방식이지 흉조가 아니다. 손볼 데가 있다면 내가 정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섞인 대목이다.
시어머니 꿈을 요즘 심리는 어떻게 읽나
여기서 정직하게 깎아 둘 것이 있다. 꿈은 상대의 마음을 중계해 주지 않는다. 꿈에 나온 표정은 그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라 내 기억이 꺼내 온 것이다. 이 꿈으로 저쪽 속을 알아내려 해도 나오는 것이 없다. 그 기대를 미리 덜어 두는 편이 마음에는 낫다.
대신 내가 그 자리를 얼마나 크게 두고 있었는지는 꿈이 꽤 정직하게 보여 준다. 가까운 사람이 꿈에 나오는 것을 관계의 징조가 아니라 낮의 긴장이 옮겨 앉은 것으로 읽는 심리 쪽 시각도 여기에 닿아 있다.
그래서 이 해몽이 권하는 오늘 할 일은 하나다. 명절이 앞에 있다면 가져갈 것 한 가지를 오늘 저녁에 정해서 빼 두는 것. 명절이 아니라면 그 자리와 얽힌 일 하나를 오늘 안에 정해 두면 된다. 십 분이면 끝나는데, 정해 두는 순간 머릿속에서 그 생각이 한 자리 빠진다. 밤에 얼굴을 빌려 나오는 것도 대개 그런 미정 상태다.
그리고 안방물림을 한 번 더 떠올려 두면 좋겠다. 그 자리에는 원래 물려줄 날이 정해져 있었다. 영영 그대로인 자리는 없다는 뜻이다.
30초로 줄이면
시어머니 꿈을 흉몽으로 세워 둔 풀이는 찾기 어렵다.
갈리는 데는 그 눈이 나를 향했는지에 있다.
옛 풍속은 이 자리에 물려줄 날을 붙여 두었다(안방물림).
알려 주지 않는 것은 상대의 속마음, 알려 주는 것은 내 쪽의 긴장이다.
명절 앞에 더 자주 오는 물음 셋
같은 꿈을 사흘 내리 꿨다면 뜻이 더 센 것인가
세기보다 잦기의 문제로 본다. 반복은 그 일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는 표시에 가깝고, 정해지면 잦아드는 편이다. 횟수로 길흉을 올려 잡던 풀이는 찾기 어렵다.
이 꿈을 당사자에게 이야기해도 되나
정해진 풀이는 없다. 다만 꿈 이야기는 듣는 쪽이 자기 이야기로 받기 쉬우니 편한 사이가 아니면 굳이 옮기지 않아도 된다.
명절이 지나면 이 꿈도 그치나
계기가 지나면 줄어드는 편이다. 그래도 남는다면 그 자리에서 내가 맡고 있는 몫을 들여다볼 때다. 해몽은 거기까지만 거들어 준다.